기념관 건립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사 연표

  • 1960.01.17.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애스컴(ASCOM)지구 미군종업원 노동조합, 부평 제3시민관에서 결성대회 개최
  • 1960.03.14.

    송도고등학교 등 30여 명의 고등학생들, 밤 10시 30분경 성산교회 앞에서 ‘학원에 자유를 달라’, ‘공명선거를 시행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10분 만에 경찰에 의해 해산됨
  • 1960.04.17.

    민주당원 수십 명, 경동 소재 민주당 을지구당 사무실에 집결해 오전 10시 30분경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3·15선거는 불법이며 무효다’, ‘이승만정부는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 시위를 시도하였으나 경찰의 제지로 무산됨. 일부 간부들은 경찰 버스에 실려 연행되어 갔으며 그 과정에서 수천 장의 유인물을 뿌리기도 함. 민주당원들은 오후 12시경 인천시당 사무실에서 2차 시위를 감행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성공하지 못함
  • 1960.04.19.

    인천공업고등학교 학생 700여 명, 오전 11시경 1교시 수업이 끝난 후 교문을 뛰어 나와 3·15불법선거 규탄 시위를 시작. 숭의동 로타리에서 소방차를 동원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후 잠시 해산한 뒤 오후 12시 20분경 다시 집결해 시위를 감행하려다 경찰에 의해 좌절됨
  • 1960.04.20.

    인천사범학교 학생 300여 명, 오전 9시 30분경 ‘학원의 자유와 민주적인 학생 데모에 경찰은 총칼을 쓰지 마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숭의동 청과시장 앞에서 경찰에 의해 해산됨. 이 과정에서 남학생 19명, 여학생 11명이 경찰에 연행됨
  • 1960.04.21.

    인하대학교 학생 100여 명, 학교를 출발해 경동파출소를 거쳐 답동광장에서 연좌시위 전개. 학생들은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동료들이 부상을 당하자 인천시청 앞까지 진출, 선서문을 낭독한 후 구타 경관의 구속 처벌을 촉구. 경기도 경찰국장의 구타 경관 처벌 약속을 받아낸 뒤 오후 1시 30분경 학교로 돌아감
  • 1960.04.22.

    인천지역 중·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 신흥동 소재 해광사 앞에 모여 ‘정·부통령 선거 다시하자’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가행진 전개. 경동파출소 앞과 인천시청 앞으로 향하는 동안 학생들이 합류하여 시위대가 2000여 명으로 늘어남
  • 1960.04.23.

    인천시내 초·중·고등학교 학생 200여 명,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 모여 ‘3·15 선거는 불법 무효이다’, ‘이승만 정부는 물러나라’, ‘평화적 집회, 데모의 자유를 방해말라’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동인천역, 인천시청 앞을 지나 동인천 경찰서 앞에서 ‘살인경찰은 물러나라’고 외치며 시위. 이 날 인천여자중학교 학생 300여 명도 경동 거리에서 시위를 시작해 시가행진을 벌임
  • 1960.04.24.

    송도고등학교 학생 500여 명, 답동광장에서 「4·19순국학생 추도식」을 거행하고 ‘4·19순국학생 위로하자’고 적힌 플래카드를 앞세운 채 시위 전개
    인하대학교 학생들, 차량을 이용해 4·19혁명 희생자를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 모금된 현금 40만 4000원은 기호일보사 모금계에 접수
  • 1960.05.03.

    인천 항만노동자 30여 명, 인천항만자유노동조합과 한운분회에 대하여 어용노조라며 규탄시위 전개
  • 1960.05.10.

    학익동 소재 흥한방직 인천공장에 2년 전 해고된 노동자 40여 명이 모여 복직 등을 요구하며 시위
  • 1960.05.19.

    고잔동 소재 인천화약공장 노동자 200여 명, 노동조합 결성을 요구하며 시위 전개
  • 1960.05.26.

    인천지역 중·고등학교 교원노동조합 결성대회가 제2시민관에서 대의원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됨. 위원장에 수산고등학교 교사 이동렬을 선출
  • 1960.06.17.

    인천 미군 유류보급창(POL) 노동자들, 평화공사에 현행 노임의 60% 인상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답변이 없자 총파업 돌입
  • 1960.06.24.

    인천 미군 유류보급창(POL) 노동자 500여 명, 이날 오전 노동자 70여 명이 신포동 소재 평화공사에 찾아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다가 그중 5명이 경찰에 연행되자, 인천경찰서에 몰려가 취조를 받고 있던 동료 노동자 5명을 데리고 나옴.
  • 1960.06.30.

    인천 미군 유류보급창(POL) 노동자 550여 명, 위원장 등 5명이 인천항만자유노동조합 위원장 등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데 항의하여 인천경찰서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임. 그중 200여 명은 인천경찰서를 습격해 정문 유리 등을 파손함. 이 날 시위로 35명이 구속됨
  • 1960.07.02.

    6월 30일 발생한 인천 미군 유류보급창(POL) 분회 노동자들과 자유항만노동조합원들 간의 분쟁과 관련해 인천항만자유노동조합 위원장 등 6명을 구속함
  • 1960.07.19.

    인천사범학교 졸업생 100여 명, 문교부 현관 복도에서 ‘금년도 졸업자 전원을 보직케 하여 줄 것’, ‘부정채용교사 추방’ 등을 요구하며 연좌시위
  • 1960.07.20.

    경기지구 해상선원 노동조합 결성
  • 1960.08.25.

    부평지역 42개 이발소에서 근무하는 종업원 100여 명, ‘부평지구 이용사 노동조합’ 결성
  • 1960.09.03.

    인천군화기술원(仁川軍貨技術員) 노동조합, 내동 중앙예식장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작업청부회사인 신한공사가 9월 9일까지 임금 인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9월 10일부터 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
  • 1960.09.19.

    인천군화기술원 노동조합 파업 돌입
  • 1960.09.21.

    인천지역 미군부대 종업원 150여 명, 한미행정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촉구하며 신흥동 일대에서 시위 전개
  • 1960.09.24.

    인하대학교 학생들, 학도호국단 해체에 따라 선거를 통해 자치회 구성. 전교생 788명 중 749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서광열을 회장으로 선출
  • 1960.10.02.

    대한노총 강화지구 섬유노동조합 결성대회 개최. 위원장에 평화직물공장 이덕문 선출
  • 1960.11.15.

    대한중공업공사 인천공장 노동조합, ‘현행 임금의 100% 인상’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태업에 돌입
  • 1960.11.28.

    인천 미군 유류보급창(POL)·군항(軍港)·기술·검수원 등 4개 노동조합, 단위노동조합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군화(軍貨) 노동조합을 결성해 통합하기로 결정. 이에 따라 이 날 인천군화 노동조합 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오영제를 위원장으로 선출
  • 1960.12.01.

    ‘4월혁명 청년동지회 인천지부’ 결성대회가 시내 문화원에서 개최됨. 각 동에서 선출된 40여 명의 대의원들이 참석하여 지부장에 박재현을 선출
  • 1960.12.03.

    김효성 등 16명 명의로 ‘전국 사월혁명 상이학생 동지회 인천지부 설립취지서’ 발표
  • 1960.12.07.

    인천 미군 유류보급창(POL)·군항(軍港)·기술·검수원 등 4개 노동조합, 제2시민관에서 통합대회를 개최하려고 하였으나 군항노동조합에서 일부가 반대하여 무산됨
  • 1960.12.11.

    4월혁명 학생동지회 인천지부, 인천사범학교 교정에서 「4·19혁명정신앙양 및 계몽 선전회」 개최
  • 1960.12.15.

    인천지구 경비원 노동조합 창립총회 개최
  • 1960.12.18.

    인천지구 미군자유노동조합, 수습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조합 명칭을 ‘인천지구 미군작업노동조합’으로 개칭한 후 임원을 개선하여 위원장에 김길용을 선출
  • 1960.12.24.

    경기지구 해상선원 노동조합,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정상 노임 지불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해 12개 업체에 통고
  • 1961.01.17.

    고려호 선원 69명, 인천항에 입항하자마자 4차 파업 돌입
  • 1961.01.27.

    인천지구 미군부대 종업원들, 임금인상과 대우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시위를 감행할 것이라고 경찰에 통고
  • 1961.02.13.

    인천을 포함한 서울, 부산 등지의 주한미군부대 한국인종업원 1만 2000여 명, 한국인 종업원에게 한국 노동법을 적용할 것과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쟁의 돌입. 같은 날 인천 미제45공병기지창 경비를 맡고 있는 대한상이용사회원 120여 명도 비슷한 이유로 쟁의 돌입
  • 1961.02.17.

    경기지구 어민 300여 명, 18대의 트럭에 타고 ‘어업용 유류에 대한 물품세 면제, 중간 이득기관 유류판매업 대행상사 배격’ 등을 외치며 시내 일원에서 시위 전개
  • 1961.02.19.

    인천·부평을 포함한 전국 미군종업원 노동조합연합 소속 종업원들, 서울역 앞에서 ‘한미행정협정체결‘ 등을 촉구하며 집회를 갖고 ’빈곤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노동법을 적용하라‘, ’퇴직금제를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을지로입구까지 거리 행진을 진행하다 경찰과 충돌
  • 1961.03.20.

    인하공과대학 학생자치회, 학내 파동으로 인해 동맹휴학
  • 1961.03.21.

    ‘인천지구 자동차 노동조합’ 결성식이 부평문화예식장에서 대의원 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됨. 이 자리에서 대우 개선 및 노동령에 의한 법적 보장 등을 결의하고 위원장에 심봉걸, 부위원장에 최이봉, 이기흥을 선출
  • 1961.03.31.

    인천 부두노동자 3500여 명,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24시간 시한부 파업 단행
  • 1961.04.11.

    전국 미군종업원 노동조합, 인천·부평 등지에서 파업 찬반투표를 진행. 투표 결과 93.5%가 찬성했다고 발표
  • 1961.10. *

    인천산업전도위원회 조직. 1961년 9월, 인천서지방 감리사 내리교회 윤창덕 목사, 인천동지방 감리사 주안교회 조용구 목사가 산업선교 훈련을 받고 한국에 온 조지 오글(Georgy E. Ogle, 한국명 : 오명걸) 목사에게 인천에 와서 산업선교를 하도록 요청한 후, 이들에 의해 인천산업전도위원회가 조직됨
  • 1961.10.03.

    인천부두노동조합, 중앙동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하고 지부장에 전병주(田炳疇) 선출.
  • 1961.10.04.

    전국외국기관종업원노동조합 인천POL특수지부, 숭의동 승애원 강당에서 결성식을 개최하고 지부장에 오영제(吳永濟) 선출
  • 1961.10.10.

    전국화학노동조합 대한제분지부 재결성. 지부장에 오세만(吳世晩) 선출
  • 1961.10.14.

    인천부두노동조합 군항분회·검수분회·기술분회·서구분회·인항분회·월미분회 결성
  • 1961.10.23.

    인천부두노동조합 미창분회·동방분회·신한분회·세신분회·한염분회·대한제분분회·국제분회·하수분회 결성
  • 1961.11.11.

    인천부두노동조합 통운분회·유니온분회·화창분회·황해분회 결성
  • 1961.11.13.

    인천부두노동조합 교동분회 결성
    인천부두노동조합, 25개 분회장을 임명하며 분회 조직 구성을 완료함
  • 1961.11.23.

    검찰,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위반 피고사건 공판에서 전 동인천경찰서장?사찰계 경사 등에 대해 3·15선거 당시 자유당 정부통령 입후보자를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에 적극 가담한 혐의로 징역 10월을 구형함
  • 1961.12.11.

    한국기계 노동조합 설립
  • 1961.12.20.

    인천부두노동조합 만석분회 결성
  • 1962.02.14.

    인천사회대중당 사건 관련자 3명, 혁명재판소 제2심판부에서 ‘2대법 반대 등을 통해 반국가행위를 한 혐의’에 대해 인천시당 간사장·총무위원장은 무죄, 인천시당 조직위원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음.
  • 1962.04.20.

    인천부두노동조합 연평분회 결성
  • 1962.06.20.

    인천부두노동조합 백령분회 결성
  • 1962.07.16.

    용현동 소재 미군 유류보급창에서 근무하던 노동자 정일도 외 29명, 고용주인 국제실업으로부터 ‘부당하게 휴직 처분 당하였으므로 복직시켜주는 한편 휴직보상금을 달라’고 인천시 당국에 호소. 이들은 건강상태가 나쁘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휴직 처분을 받았으나 이후 병원에서 진단받은 결과 취업에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므로 회사 측의 처분은 노동자의 권익을 유린하는 처사라고 주장함
  • 1962.09.06.

    인천부두노동조합, 체불 노임을 추석 전까지 완불해 달라고 각 관계 기업체에 요구
  • 1962.09.19.

    부평3동 ‘아리랑 홀’에서 ‘윤락여성 자치총회’가 3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됨
  • 1962.09.22.

    경인일보, 정부의 언론정책에 따라 경기매일신문과 통합하는 원칙 하에 휴간함. ‘우선 경기매일신문사와의 통합을 원칙으로 하고 사원들은 비례원칙 하에 두기로 한다’는 내용에 타협을 봄. 경인일보는 1951년 8월 1일자로 인천일보를 제호로 하여 창간된 이후 경인일보로 게재하였으며 총 11년 50일간 신문을 발행함
  • 1962.10.02.

    인천시, 경찰과 함께 거리에서 18세 미만 부랑아 37명을 적발해 선감도(仙甘島)에 수용
  • 1962.12.21.

    인천부두노동조합, 영진공사와 단체협약을 체결해 임금 22% 인상에 합의
  • 1962.12.30.

    전국해상노동조합 인천지부, 동방운수와 유급휴가를 대폭 설치하는 방향으로 단체 협약 체결. 군복무 후 복직 원칙, 해고시 1개월 전 통고, 유급휴가 1개월에 1일 및 1년에 8일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함
  • 1963.01.19.

    인천부두노동조합 직원분회 결성
    경기도 지방노동위원회, 대한중공업 해고 노동자 118명에 대해 해고 수당을 지불하라고 의결
  • 1963.02.27.

    인천부두노동조합 경비분회 결성
  • 1963.03.12.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미군 당국의 대량 감원 조치에 따라 부평 등지에서 300여 명의 한국인 종업원이 감원됐다고 밝히고 9월부터 진행돼 온 미군과의 교섭이 결렬되면 전국적인 시위를 전개하겠다고 발표함
  • 1963.06.05.

    인천중공업, 「정부관리기업체보수통제법」 철폐를 요구하며 정부에 쟁의 발생 통고
  • 1963.06.14.

    부평 애스컴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한국인 종업원 6000여 명, 처우개선과 감원반대,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이날 시위를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경찰의 시위 허가 불허로 좌절됨
  • 1963.06.29.

    만석동 소재 삼화제분 인천공장 노동자 72명, 고용알선을 맡은 동방운수와 삼화제분 인천공장에 대해 ① 중간착취배제, ② 단체협약체결, ③ 출입금지자 복직 ④ 노임인상 등을 요구하며 공장 내에서 농성 시작
  • 1963.07.02.

    삼화제분 인천공장 노동자 72명이 6월 29일부터 농성을 진행하는 현장에 가족 30여 명이 몰려와 ‘50원으로는 도저히 보리밥도 먹을 수 없다’고 외치며 공장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경찰의 제지로 실패함
  • 1963.07.03.

    6월 29일부터 농성중이던 삼화제분 인천공장 노동자 72명 중 68명, 집회를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출동한 경찰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연행되어 불구속 입건된 뒤 7월 4일 자정에 귀가 조치됨
  • 1963.07.04.

    삼화제분 인천공장 노동자들의 농성과 관련해 전국화학노동조합 인천지부 삼화제분공장 분회 부분회장 윤민호와 분회원 조동환?박용조 등 3명, 경찰에 구속됨
  • 1963.07.06.

    삼화제분 인천공장, ‘현장노무자 전원 계속 취업, 임금 15% 인상’ 등 노사 간에 6개 항에 대한 협정이 승인됨으로써 정상 조업 시작
  • 1963.07.31.

    새나라자동차 노동조합, 7월 30일자로 262명의 노동자 중 198명에게 집단해고 통지서가 발부되자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집단해고 반대, 휴직일 경우 법정휴직수당 지급, 밀린 야간수당과 휴일 특근수당 지급, 공로금 지급’ 등을 회사 측에 요청
  • 1963.11.07.

    새나라자동차 노동조합 조합원 100여 명, 회사가 8월부터 임시휴업 상태에 있는 와중에 체불 임금 590만 원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며 정문 앞에서 연좌 농성 돌입
  • 1963.12.22.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인천지부, 긴급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단체협약에 체결된 법정수당, 연말상여금 등을 업자 측인 신정산업에서 지불하지 않을 경우 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
  • 1964.01.02.

    인천 미군항 작업 노동자 1000여 명, 미8군 당국이 미군보조하역 입찰에 따른 입찰업자를 고의로 기피한다고 주장하며 작업을 중지하고 파업농성 돌입
  • 1964.01.12.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인천지부 노동자 1000여 명, 신생동 인천세관 앞 광장에서 「임금인상 촉구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10개 항의 결의문 채택
  • 1964.01.20.

    미 제2수송사령부 75선박부대장이 쟁의중인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인천지부장을 부대 사무실에 4시간 동안 연금시키고 사표에 강제 날인하도록 하는 사건 발생. 이날 미CID가 한국인 종업원들을 불법 연행하여 지부장의 부정에 대한 허위진술서를 작성하도록 한 사실도 후에 밝혀짐
  • 1964.01.24.

    전국해상노동조합 인천어로지부 소속 조합원 500여 명, 북성동 수협 경기도지부 위판장에서 「평화선 사수 인천지구 어민 궐기대회」개최
  • 1964.01.25.

    전국해상노동조합 인천지부, 신한공사와의 단체협약을 조인하고 2월 1일부터 실시
  • 1964.03.23.

    인하공과대학 주간부 학생 1200여 명, ‘학교 당국이 학생들의 자율적 활동에 대해 필요 이상의 간섭을 한다’고 주장하며 김병희 학장의 불신임을 결의한 후 6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수업거부에 들어감. 이후 8월 13일 김병희 학장이 정식으로 사표를 내면서 4개월간의 분규가 마무리됨
  • 1964.03.27.

    인천시내 7개 중?고등학교 학생 9500여 명, ‘대일굴욕외교반대’ 등을 외치며 한일회담 반대 시위 전개
  • 1964.03.30.

    인하공과대학 ROTC 학생 120여명?기숙생 40여 명 등, 학교 본관에 가마니를 깔고 철야 연좌시위에 돌입함. 학생들은 ‘김학장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말라’, ‘교수회는 즉시 이 긴급사태를 수습하라’, ‘인하의 고유전통을 말살말라’는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농성장에 게시. 이튿날인 3월 31일 인하공과대학 재단이사 등이 학생들과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문교부 책임 하에 재단이사와 협조하여 인하공대를 대대적으로 수술하겠다’는 확약을 받고 농성을 중지함
  • 1964.04.21.

    인하공과대학 교수 58명, 김병희 학장의 비행을 시정해 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박정희 대통령 및 각계 요로에 제출
  • 1964.05.09.

    한국판유리공장 노동자 150명, 임금 35.6%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 돌입
  • 1964.06.03.

    인하공과대학, 비상계엄령 선포로 휴교
  • 1964.06.10.

    인천신문사?경기매일신문사 등이 포함된 한국신문발행인협회?한국신문편집인협회, 「시국수습선언」을 신문지상에 발표
  • 1964.07.26.

    노총 제44차 중앙위원회, 계엄이 선포되지 않은 지역인 인천 소재 인천노동회관에서 긴급회의를 갖고 ‘노동조합법 개정 법률안 반대’를 결의
    새나라자동차 노동조합 노조원 130여 명, 노동쟁의에 돌입하여 ‘새나라 공장은 과거와 같은 성질의 조업을 하게 된다면 전원 해고시킬 수 없다’, ‘1963년 11월부터 무보수로 동공장을 지켜온 보수 전액을 지불하라’ 등을 요구
  • 1964.08.19.

    「언론윤리위법 철폐 경기도 언론인 대회」가 원앙예식장에서 거행되어 ‘언론윤리위법 경기도투쟁위원회’ 위원장에 경기매일신문 주필 박민규, 부위원장에 인천신문 편집국장 김응태·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 조수일이 선출됨
    새나라자동차 노동조합 조합원 23명, 1963년 2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체불된 임금 277만 4000원을 지불하라고 요구하며 단식 농성 돌입. 새나라자동차는 1963년 7월 27일 이후 공장 조업을 중단하였으며 한일은행이 접수하여 휴업 중에 있었음
  • 1964.12.09.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부평지부 투쟁위원회, 위원회를 소집하여 ‘부당감원을 즉시 철회하라’, ‘고용주의 감원 제일주의를 규탄한다’, ‘정당한 감원에는 감원수당을 지급하라’, ‘이동수당을 지급하라’, ‘임금 균일인상 및 200%의 보너스를 지급하라’ 등을 결의하고 이를 미군 당국에 요구함
  • 1964.12.13.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부평지부 조합원 2000여 명, 감원반대 시위를 진행하기 위해 모였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됨. 지부장 등 4~5명의 노동조합 간부들은 부평경찰서에 연행됨
  • 1965.02.15.

    인천부두노동조합 부위원장 겸 월미분회 분회장 외 14명, 노임 360여 만 원 횡령 사건과 관련해 관계 기관에 진정서 제출. 손정인 등은 하주인 조달청이 인상된 노임 360여 만 원을 전액 지불하였으나 이때까지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지 못한 일과 관련해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별다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후에도 계속 진정과 고소를 이어감
  • 1965.04.02.

    외국기관노동조합 부평지부 덕판기업 분회 노동자 157명, 임금 60% 인상과 상여금 100% 지급 등을 요구하며 파업 시작
  • 1965.04.21.

    인하공과대학 학생 500여 명, 교정에 모여 학교 측이 4월 20일 결정한 4월 21일~26일 간의 휴교 조치에 반발하여 정상수업을 요구하며 4월 22일 전원 등교하기로 결정한 후 해산함
  • 1965.06.08.

    한국판유리 노동조합 조합원 500여 명, 임금인상 및 퇴직금의 계상 일자에 대한 합의가 결렬되어 파업 농성 돌입
  • 1965.06.22.

    인하공과대학 학생 800여 명, 인하공과대학에서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정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 등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함. 이후 가두시위를 전개하다가 숭의동 사거리 부근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투석전을 전개. 이날 학생위원회 회장 등 30여 명의 학생들이 연행됨. 학생들은 연행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함
  • 1965.06.23.

    6월 22일 시위와 관련해 인하공과대학 학생위원회 회장 및 체육부장이 구속되고 학생 9명이 불구속 입건, 84명이 훈방 조치됨.
  • 1965.10.15.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부평지부 건물관리분회 노조원 158명, 총회를 개최하고 단체협약 이행을 하지 않는 거양기업을 상대로 10월 18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결의
  • 1965.10.18.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부평지부에 소속된 미 애스컴 DMM보급행정부 한국인 종업원 500여 명, 종업원들이 대구지구로 이동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 측이 ① 퇴직금 2개월 선불, ② 봉급 3개월분 선불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무기한 파업 돌입
  • 1965.10.20.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부평지부 조합원 6000여 명, 미군 측이 파업 중인 미 애스컴 DMM보급행정부 한국인 종업원 500여 명을 전원 파면 조처하겠다고 밝히자, 긴급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총파업 결의. 애스컴 DMM 및 DPD 한국종업원들은 10월 18일부터 퇴직금 선불 문제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으며 그중 일부는 10월 19일부터 문화예식부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함. 이들은 10월 21일 미군 당국과 합의를 보고 파업을 중지함
  • 1965.12.22.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인천POL특수지부 산하 경비원 80여 명, 임금 65% 인상 등 5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 돌입
  • 1966.01.12.

    천주교 인천교구 가톨릭노동청년회 결성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인천POL분회원 602명과 경비분회 경비원 51명, 특수지부 산하 경비원 80여 명이 노동쟁의 중 POL간부 1명을 비롯한 6명이 구속된 사건에 반발하며 파업 돌입
  • 1966.02.05.

    인천부두노동조합 대한통운분회 해상작업반 노동자 100여 명, 인천부두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대한통운 측에 대해 체불 노임을 지불하라며 농성 돌입
  • 1966.02.19.

    국외국기관노동조합, 부평·인천지부를 포함한 전국 13개 지부 2만 3000여 명이 3월 3일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11시간 동안 기한부 파업을 벌이기로 결의함. 이후 이 결정을 철회하였다가 3월 26일, 다시 4월 6일 새벽 4시부터 24시간 동안 파업을 벌이기로 재결의
  • 1966.03.04.

    전국해상노동조합, 인천 등 항만준설공사에 종사하고 있는 산하 조합원 940명에게 3월 7일 오전 8시를 기해 무기한 파업에 들어갈 것을 지령
  • 1966.04.06.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24시간 시한부 파업 돌입. 부평지부 3000여 명도 파업에 돌입하여 ‘파업 중’이라는 휘장을 가슴에 달고 부평지부 관내 17개 부대 영문 앞에서 5시간 동안 연좌 농성 전개. 이 날 인천지부 산하 노조원 2000여 명도 파업 진행.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은 3월 2일 체결한 노사협정 가운데 ① 해고 또는 정년퇴직자는 10년에 21개월 분, 사직자는 17개월분의 퇴직금 지불 ② 임금은 하후상박으로 하고 14%~20% 인상할 것 등에 대해 미8군이 미 국방성이 인가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이행하지 않자 쟁의에 돌입함
  • 1966.08.14.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도 본당에서 12명의 가톨릭노동청년회 여성 회원들이 투사 선서를 받음
  • 1966.11.11.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인천 POL특수지부 산하 부평지구 경비분회 조합원 316명, 대행사인 한융실업에 대해 8?9?10월분 체불 노임 436만 원 지급을 요구하며 파업 돌입
  • 1967.05.14.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직할분회) 결성
  • 1967.06.12.

    인천산업전도위원회, 6월 12일부터 6월 30일까지 「노동조합 지도자 교육」진행. 13개 사업장에서 42명이 참가하고 30명이 수료함. 당시 인천산업전도위원회는 내리교회 이명구 목사가 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실무자들의 역할과 위원회 구성은 아래와 같음
  • 1967.06.14.

    인하공과대학 학생 1000여 명, 학교 교문 앞에서 ‘6·8선거부정’ 규탄 시위 전개. 이날 인하공과대학은 시위로 인해 무기 휴교에 들어감
  • 1967.07.19.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 박부양을 분회장으로 선출
  • 1967.08.17.

    고려대학교 부설 노동문제연구소, 「인천시노동사정분석」이란 책을 출판하여 인천지역의 노동쟁의 비율이 세계 최고라고 분석함. 노동문제연구소는 인천 소재 52개 노동조합 2만 7394명을 대상으로 1965년 12월부터 1966년 11월에 걸쳐 노동쟁의 실태를 조사분석하였으며 해당 기간 동안 인천지역 31개 노동조합 1만 9665명이 쟁의에 참가하였다고 밝힘
  • 1967.11.20.

    인천부두노동조합, 민수물자 하역노임율 65~100% 인상을 요구하며 쟁의 중 파업가부 투표를 진행하여 노조원 1439명 중 1282명의 찬성으로 총파업 결의
  • 1967.12.17.

    강화도 상호직물에서 12월 17일~12월 22일 사이에 천주교 신자 6명을 포함한 14명의 노동자들이 근무 태만을 이유로 해고당함
  • 1967.12.18.

    강화도 상호직물 노동조합 결성
  • 1967.12.30.

    강화도 이화직물에서 2명의 천주교 신자가 해고당함
  • 1968.01.04.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 분회장, 2일 간의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당함
  • 1968.01.06.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 조합원들, 분회장의 해고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공장 내 회의 소집을 요청하였으나 회사 측이 해고된 분회장의 참석을 허용하지 않음. 조합원들은 곧 경찰에 집회 신고를 한 후 공장 앞 천주교회에서 운영 중인 건물 강당을 빌려 회의 개최. 조합원 500여 명이 회의에 참석해 강당 뜰까지 운집해 있자, 경찰은 하늘이 보이는 곳은 옥외 집회에 해당된다는 이유를 들어 천주교 신자 5명을 연행하고 이후 일주일에 거쳐 천주교 신자만을 골라 30여 명을 연행함
  • 1968.01.07.

    강화도 심도직물 회사 측 사람들과, 강화경찰서 서장·정보계장 등이 오전에 강화도성당을 방문, 전 미카엘 신부에게 ‘노조를 선동하고 기업운영에 간섭’하였으며 ‘무식한 노동자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주입시켰다’는 등의 말로 항의하고 반공법 제4조를 적용해 입건하겠다는 등의 위협을 가함. 같은 날 오후 4시, 회사 측이 심도직물 공장 정문에 ‘천주교 전 미카엘신부(미국인)의 부당한 간섭으로 공장 작업을 무기휴업한다’는 내용의 공고문을 게시하고 공장 폐쇄
  • 1968.01.08.

    강화도 심도직물, 상호직물, 이화직물 등 강화도 소재 21개 공장 대표로 구성된 직물업자 협회가 앞으로는 천주교 신자와 JOC 회원들을 채용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된 7개 항목의 결의문 채택
  • 1968.01.09.

    천주교 가톨릭노동청년회 본부,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과 관련하여 강화도 직물업자협회가 발표한 7개 결의사항의 전면 취소와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공문을 업자들에게 발송
  • 1968.01.18.

    천주교 인천교구 교구장 나길모 주교,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과 관련해 ‘특별메시지 발표
  • 1968.02.07.

    천주교 주교단, 강화도 심도직물에서 천주교 신자 8명이 부당 해고된 사건과 관련해 비상회의를 개최하고 부당 해고된 신자의 즉각 복지과 성직자를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하겠다고 위협한 경찰서 간부의 공개 사과 등 3개 항을 결의
  • 1968.02.11.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과 관련해 강화도 천주교 본당에서 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대응책 논의 시작
  • 1968.06.27.

    강화도 심도직물 전 노동조합 분회장이 징계 해고 당한 데 대해 섬유노동조합이 신청한 부당노동행위 재심신청에 대하여 중앙노동위원회가 회사 측에 복직을 명함
  • 1968.07.01.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인천 미군 유류보급창(POL) 분회 회원 591명, 임금 32%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 돌입
  • 1968.09.06.

    인천부두노동조합 간부들이 조합원들에 지급할 노임을 횡령한 혐의로 지부장, 대한제분 분회장 등 5명이 구속됨
  • 1969.01.26.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부평지구 「제9차 정기 대의원회 회의자료」에 따르면, 이 날 현재 부평지역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남녀 종업원은 3722명(남 3363명, 여 359명)이며 부평지부의 분회는 모두 41개임
  • 1969.03.22.

    인천중공업 노동조합, 제26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노동쟁의 결의. 조합원의 임금을 현행 기본급의 40%를 인상 지급할 것을 요구하며 879명(남 853명, 여 26명)이 쟁의에 참가
  • 1968.05.13.

    부평지역 ‘위안부’ 1000여 명, 동료 여성이 미군의 학대에 못 이겨 자살했다고 주장하며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상여를 멘 채 애스컴 미군부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임
  • 1969.05.17.

    미군 상병이 부평동에서 ‘위안부’에게 신분증을 주고 동침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옷걸이로 목을 졸라 살해함
  • 1969.05.23.

    인천공작창 노동자 800여 명, 민영화 반대하며 궐기대회 전개
    국제실업 노동자 1063명,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쟁의
  • 1969.07.05.

    인하공과대학 학생 200여 명, 3선 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교문 밖으로 진출하려다 경찰의 제지로 연좌시위 진행
  • 1969.09.22.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부평지부 3개 관리 분회 조합원 406명, 부대 내 작업장에서 미군 측이 2000여 명의 한국인 종업원을 감원시킨다는 계획에 항의해 성토대회 개최
  • 1969.10.11.

    인하공과대학 학생 500여 명, ‘3선 개헌안을 즉시 철회하라’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 개최
    전국섬유노동조합 동일방직 지부 지부장과 동일방직주식회사 인천공장 전무이사 간 「단체협약」 체결
  • 1969.10.20.

    인하공과대학, 3선 개헌 반대 시위로 9월 12일부터 무기한 휴강에 들어갔다가 개강함
  • 1969.12.31.

    인천제철주식회사와 인천중공업주식회사 간 합병 계약 체결. 합병 기일은 1970년 4월 1일이며 인천제철주식회사가 인천중공업주식회사를 합병하는 형태임. 같은 날 인천중공업 노동자들은 ‘각과별 권익 투쟁위원 일동’ 명의의 호소문을 발표하여 계약서 제10조에서 명기한 ‘현재의 중공업 종업원은 해고되고 제철과의 새로운 고용 계약을 체결한다’는 규정을 문제 삼아 권리 회복을 위해 단결할 것을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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