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 건립

인천지역 열사 및 희생자

강남근

2003.2.11 운명, 당시 63세, 전남 해남군 송지면에 안장
  • 1940년

    전라남도 완도 출생
  • 1972년

    11월 5일 인천지역 3선개헌 반대모임 참석 이유로 중앙정보부 인천분실로 강제연행. 용공조직 결성 협박받으며 고문당함.
  • 1972년

    11월13일 허위자백을 하지 않자 동인천경찰서로 이송되어 보건범죄단속법 위반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구속당함.
  • 1983년

    8월 김대중 전대통령과 찍은 사진과 단파라디오 소지를 이유로 강제연행. 고정간첩으로 협박받으며 고문당함. 허위자백을 하지 않자 고문 상처를 감추기 위해 폭행혐의로 별건 구속함.
  • 2003년

    2월11일 고문후유증과 간암으로 힘겨운 투병생활 하시다 “나 같은 고문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63세를 일기로 운명

조직사건 연루, 고문...끝내 사경헤매

응어리진 30년 세월, 이제는 죽음만이 그의 곁에...
처참했다. 멍하니 풀린 동공에 황달기 가득한 눈, 시꺼멓게 죽어있는 정강이, 핏물이 배어나오는 잇몸, 응혈을 흡입해낸 자국이 선명한 뼈마디 불거진 등,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여윈 팔목.

이같은 모습으로 기자 앞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사람은 72년 11월 '삼선개헌 인천지역 반대모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지하밀실에서 뼈를 깎고, 살을 태우는 모진 고문을 당한 강남근(63)씨다.
전국민주화운동상이자연합(의장 강용재·이하 전민상련)으로부터 강씨가 최근 간암말기 판정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 서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인천시 간석3동 두진아파트 102동 1610호. 강씨는 그렇게 생명을 다한 촛불처럼 사위어가고 있었다. 반쯤은 혼수상태라 직접 인터뷰가 어려울 정도였다.
동행한 전민상련 강용재 의장과 조광철 대회협력국장의 사전설명과 강남근씨의 친구로 그들 자신도 70년대 고문피해자인 조성준(73), 이충열(61)씨의 증언으로 재구성해본 강씨의 고문 당시 정황은 이렇다.
전남 완도가 고향인 강남근씨는 71년 대통령선거 당시 인천지역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연한 수순처럼 김대중 후보 낙선 이후 강씨는 '요시찰 인물'로 낙인 찍혔고, 늘상 감시가 뒤따랐다. 72년 강씨와 뜻을 같이 하던 선후배들은 강씨의 지인이 운영하던 태화당한약방에 자주 모여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을 비판하는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다.
이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내부의 밀고자에 의해 정보기관에 보고됐고, 같은 해 11월 중앙정보부 인천분실에 연행된 강씨는 '용공조직 결성을 자백하라'는 협박을 받으며, 주먹과 몽둥이로 온몸을 구타당하는 등의 고문을 당했다.
며칠간의 고문에도 강씨가 허위자백을 하지 않자, 중정은 강씨를 경찰서로 넘겼고, 고문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의료면허도 없으면서 침을 놓는 등 의료행위를 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보건범죄단속법 위반혐의로 강씨를 기소한 것이다.
73년 5월 고통스런 7개월여의 재판기간을 겪고서야 강씨는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각혈과 수시로 쏟아지는 코피, 찢어지는 듯한 등과 다리의 통증. 고문의 후유증은 30년간 강씨를 옭아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83년 8월에는 군사정권 하의 정보기관은 김대중 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과 배의 운항을 위해-강씨는 당시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사용하던 일본산 단파 라디오를 이유로 들어 강씨를 고정간첩으로 몰려 했다.
"빨갱이들에게 돈을 얼마나 줬어"라고 이어지는 추궁. 이 사건 역시 모진 고문으로도 강씨가 '허위자백은 할 수 없다'고 버티자, 폭행혐의로 별건 구속해 고문으로 입은 상처가 사라질 동안 강씨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간암이 악화된 강씨는 며칠 전인 2월3일 인천 중앙길병원으로부터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죽음의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70Kg이 넘던 몸무게가 두 달 사이에 20Kg이나 빠져 앙상한 몰골. 30년을 응어리진 가슴 속 한을 풀지 못한 그는 이제 희망의 끈도 놓고 있었다.
그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원회)가 보상신청을 기각했을 때의 심경을 묻는 질문에 숨을 몰아쉬며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이 상은 나 혼자만의 상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우리 동지들의 상이다. 상금은 그들을 위해 쓰겠다'고 말해놓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소망이 있을텐데"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이젠 아무 관심이 없다. 한심한 세상이다."
그가 바란 것은 몇 푼의 보상금이 아니었다. 조작된 용공사건의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고, 다시는 고문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가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씨의 바람은 변하지 않은 현실 앞에 무력했다.
강씨의 대답에 귀기울이던 이충렬씨가 목소리를 높여 불만을 토로했다. 이씨도 73년 신민당 인천갑지구당 청년부장 재직 시절 조작사건에 연루돼 인천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했고, 관명사칭으로 구속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던 사람이다.
"만약 기각결정을 내린 심의위원이 내 옆에 있었다면 가만 있지 않았을 거야. 우리가 아픈 것은 사회가 아픈 것이고, 우리가 죽는 것은 사회가 죽는 거야. 우리가 돈 몇 푼에 지조를 팔았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못된 짓을 했어? 옳은 일을하다가 고문 받고 고통받는 사람을 나라가 외면한다면 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살려고 하겠어?"
박정희 유신시대 또 다른 고문피해자이면서 역시 보상신청을 기각 당한 조성준(민주수호뿌리회의 인천시 지부장)씨 역시 "젊었을 때부터 여러 사람을 도와준 사람인데..."라며 강씨의 비참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요즘도 병원에 수시로 드나든다는 그는 "고문후유증은 평생을 가도 잊혀지지 않는 악몽이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직도 치가 떨리는 고문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일흔을 넘긴 노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리를 함께 한 강용재 의장-그 역시 전두환 정권에 의한 고문피해자다-은 "이 분들은 유신시대와 군사독재시절에 매수 유혹도 뿌리친 분들이다.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온 사람들의 최후가 겨우 이런 모습인가"라며, "철저한 사건의 진상조사와 고문 등 반인륜 범죄의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민주화운동보상에 관한 특별법의 마련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대부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살아남은 분들도 노령으로 인해 흐려진 기억력 때문에 당시의 반인륜 범죄를 증언해줄 분들이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며, "이 분들이 살아생전에 억울함만은 풀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절박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돌아오는 길. 강남근씨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자꾸만 눈에 밟혔고, 이충열씨의 "기회주의자와 깡패들이 득세한 세상이 한탄스러워. 불쌍한 국민들만 매맞고, 욕먹는 이런 세상이 무슨..."이란 말이 귓전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2003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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