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 건립

인천지역 열사 및 희생자

유순조

2002.3.8 운명, 당시 52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 1950년

    출생
  • 1987년

    이천전기 입사
  • 노동자대투쟁에 참여, 구속 이후 3차례에 걸친 해고와 복직
  • 1999년

    이천전기가 삼성중공업으로 매각된 후 다시 일진중공업으로 매각되는 과정에서 동료 백여 명과 함께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주도하면서 2차례 구속당함
  • 2002년

    3월 8일 암으로 운명

열사의 삶과 죽음

유순조 열사는 50년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노동을 시작하여 20대에 참담한 노동 현실에 눈을 뜨고 많은 노동 현장을 전전하다 84년 이천전기에 입사했다.
열사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투옥되었고 3차에 걸친 해고를 투쟁으로 무력화시켰다. 그 후 98년 금융위기 때 정리해고를 반대하고 생존권을 지키려다 다시 투옥됐다. 저들의 해고와 투옥 등 모진 억압으로도 진실을 향한 열사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천전기 해고 이후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에서 활동하면서 인천지역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열사, 자그마한 체구에 푸른 수의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입가엔 늘 귀까지 걸리는 웃음을 짓던 열사, 열사의 말과 행동은 화려하고 분주하지 않았지만 그 환한 미소로 해고투쟁을 같이하는 열사들에게 늘 커다란 힘을 주었던 열사, 투쟁과 긴장으로 점철된 열사의 삶에 어느새 암이라는 무서운 병마가 찾아들었고 처절한 투병 끝에 2002년 3월 8일 운명했다.

묘역사진


 

《인물탐방》‘황소고집’ 노동운동가 유순조 다가오는 봄을 맞지 못하고 끝내 떠나간 이여!

“뭐랄까? 그 사람은 있는지 없는지 잘 안보이는데 찾아보면 기둥같은 사람이랄까?”
인천 연수동의 한 아파트 안방에 들어섰을 때 소파위에 이불을 겹겹이 쌓아 침대처럼 만들어 누워있는 유순조씨에게서 우람한 덩치에 건강한 체격, 우직해 보였던 평소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깡말라 뼈만 남은 그의 모습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의 고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삼성그룹의 정리해고에 항의하는 투쟁을 한 2년 동안 했지. 그러다 싸움 정리되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노가다를 뛰었어. 근데 출근하는데 뒤가 못 견디게 불편하드래. 도저히 안되겠어서 점심시간에 잠깐 다녀올 요량으로 근처 병원을 갔는데 의사가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드래.”
큰 병원으로 옮겨가니 대장암이 이미 간과 장기 폐까지 번져 더 이상 손을 쓸 수조차 없다는 충격적인 진단결과가 나왔다.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 조광호 위원장이 담담한 어조로 대신 말을 이어갔다. “황소고집이야. 특히 경찰하고 싸울 때는 못 말리는 고집이야. 경찰이 3-4명이 달려들어도 주먹 딱 쥐고 버티면 못 당해.” 그래서 동료들은 “그래도 오래 버틸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찾아오는 봄을 맞지 못하고 3월 8일 밤 고인이 됐다.

반복되는 해고 그리고 ‘피 말리는 복직투쟁’의 연속
유씨의 동료들은 모두 그가 해고와 복직을 반복하는 ‘피 말리는 투쟁’과정에서 점차 속으로 깊은 병을 얻은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유순조 병이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야. 해고와 복직을 반복하면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그러다가 이천전기가 삼성그룹으로 넘어간 이후에 정리해고 되니까 막막하고 상대도 없는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발병이 된거지.”
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이천전기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을 벌이며 파업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세력의 위원장 후보로 물망에 오른 유씨는 보안사로 끌려갔고 해고로 이어졌다. 3년에 걸친 법정투쟁을 벌여 유씨는 마침내 복직 판결을 받냈다. 그러나 92년 노조위원장 선거과정에서 위원장 후보 물망에 오른 유씨를 회사측은 그냥 놔두지 않았다. 당시 이천전기에서 수년 동안 내려온 관행이었던 “야간작업 중 술 한잔”을 빌미로 유씨는 또다시 해고당했다. 때는 92년 노조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기, 진짜 해고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다시 복직투쟁을 시작해 1심 재판에서 승소해 96년 4월 두 번째 복직, 유씨는 해고반대 투쟁 승리의 ‘신화’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98년, 이미 삼성그룹으로 넘어가 있던 이천전기는 부실이 악화돼 퇴출기업에 선정됐고 노동자들에 대한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일방적 구조조정 반대 및 생존권 확보투쟁’이 다시 시작된 거다. 2000년 여름, 회사측과 합의해 투쟁을 끝내기까지 유씨와 그 동료들은 뜨거운 여름이나 바닷바람 찬 겨울을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유씨는 두 차례나 구속을 겪어야 했다. 그때부터 몸에 이상을 느끼고 있었지만 병원을 못가고 있던 유씨는 끝내 몸져누워 돌아오지 못할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아직도 산적한 과제를 후배노동자들에게 남기고
평범하게, 열심히 일만하던 유씨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은 81년께. 풍산금속에서 해고되면서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뭣 모르고’ 해고된 거란다.
“풍산에서 인원감축을 하는데 늦게 입사한 사람들을 먼저 짤랐는데 그때 1년을 좀 더 다닌 나도 대상이 된거야. 근데 해고수당도 못 받았어. 그런 걸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구.”
유씨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그때 카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하던 동료와 함께 고 김말룡 선생이 운영하던 카톨릭노동상담소 찾아갔다. 그의 노동운동의 출발이었다.
지각이나 조퇴를 세 번만 해도 결근처리하고 월차와 주휴수당까지 ‘빼먹던’ 시절, 노조결성이나 임금 몇 푼 올리기 위해 작업거부나 파업을 하는 것조차 ‘빨갱이’로 몰려 해고와 구속, 때로는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던 시절. 그 암울한 현실에서도 세상을 바꿔보고자 묵묵히 싸워왔던 이름없는 이들이 있었다. 유씨가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해 이천전기 입사하기 이전까지가 그랬고 이천전기에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한국노동운동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준비했고, 우리 역사에서 ‘노동자의 존재’를 ‘노동자도 기계가 아닌 인간임’을 사회적으로 각인시켜왔다. 그렇게 이름없이 노동자의 현실을 바꿔온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인 유씨가 이젠 ‘한 몸’ 돌볼 길 없이 그 시절의 분노와 좌절, 용기와 희망이 병이 되어 떠나간다. 아직도 산적한 노동현장의 문제들을 후배 노동자들에게 해결과제로 남기고...
- 매일노동뉴스, 2002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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