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 건립

인천지역 열사 및 희생자

이대용

1987.8.1 운명, 당시 24세, 화장
  • 1963년

    4월 3일 전북 고창 출생
  • 1977년

    인천 석남동 소재 선학알미늄 입사, 야간중학교 입학
  • 1986년

    동양튜브에서 임금인상 30% 쟁취 투쟁
  • 1982년

    11월28일 강제징집 됨
  • 1987년

    8월 1일 산마루교회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 참여,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운명

열사의 삶과 죽음

이대용 열사의 부모님들은 궁핍한 농촌 살림을 벗어나고자 어린 열사를 업고 인천으로 올라왔으나 지게를 지고, 채소행상을 해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렵게 배고픔과 허기를 참아내며 공부를 하였으나 열사는 이 공부가 진정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가와 대학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갈등하게 되었다. 하지만 열사는 억척같이 삶을 살아오면서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잘살지 못하는 이 사회의 구조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공장에서 노동자로서의 삶은 그가 살아온 것만큼이나 비인간적인 대우와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열사는 여기에서 절망과 포기보다는 꿋꿋하게 일어서서 진정한 노동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맹세하고 자본가들의 착취에 대해 흔들림 없이 싸워나갔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열사는 노동자로서의 신념과 강한 의지를 다졌고 공부하고 실천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제대 후 바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86년 초 진흥요업에서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에 반대하며 투쟁을 주도하였고, 이후 동양튜브, 선창산업에 입사해서도 변함없이 투쟁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던 중 87년 8월1일부터 3일까지 매포수양관에서 열린 인천기노련 주최 ‘인천지역노동자 여름수련회’에서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한 3명의 노동자가 뛰어가 1명을 구했으나 그중 구하러 들어간 두 명이 힘이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수십 명의 노동 형제들이 인간 사슬을 만들어 구출하였으나 이대용, 김현욱, 박용선, 유인식 열사는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동료들을 구해내는 열사애로 산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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