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 건립

인천지역 열사 및 희생자

김성애

1987.11.3 운명, 당시 18세, 화장
  • 1986년

    7월 24일 진흥요업 입사(인천 남구 신기촌)
  • 1986년

    9월 12일 진흥요업에서 작업 중 화공약품에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
  • 1987년

    11월 3일 산재 중앙병원에서 산재 없는 세상을 염원하며 투신, 운명

열사의 삶과 죽음

김성애 열사는 86년 7월 24일 인천 남구 신기촌에 있는 도자기공장 진흥요업에 취업하였는데, 입사 초기부터 작업장 공기가 매우 혼탁하였고 지독한 약품냄새 때문에 두통이 심했다.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9월 10일에는 갑자기 많은 양의 코피가 쏟아졌고, 9월 12일에는 두통이 매우 심하여 점심때 쯤 갑자기 의식을 잃고 기절하여 뇌진탕으로 반신불수가 되는 등 극심한 장애에 시달렸다.
병원 측은 오염된 작업환경을 무시한 채 ‘선천성 빈혈’로 쓰러졌다고 진단하였고, 회사 측에서는 보상은커녕 김성애 열사의 모친과 외숙을 불러놓고 열사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며 거짓말로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하였다. 회사는 가족을 협박하여 산재처리를 해줄 테니 추후 어떤 법적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강요한 뒤 도장을 찍게 하였다.
87년 3월 6일 중앙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으면서 비록 반신불수가 됐지만 호전되고 있는 것에 희망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8월부터 벌어진 산재환자들의 투쟁을 보면서 자신의 모친과 외숙이 회사와 합의한 내용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무척이나 억울함을 느꼈다. 인천 산업재할원에 입원 중이던 김성애 열사는 투병 와중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진정하는 등 치료를 위해 애쓰다가 87년 11월 3일 오후 4시 10분경 병원 7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열사는 꽃다운 18세의 나이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묘비명

고 김성애 산업재해 열사여!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에 쓰러진 당신을 고이 떠나보내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죽음으로 호소한 당신의 뜻은 남아있는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작은 불꽃으로 김성애야! 활화산처럼 영원히 타올라라!

87년 중앙병원 산업재활원 산재 노동자들의 투쟁과 산재노동자 김성애 투신자살 사건

87년 당시 노동자들이 일하다 다쳐도 산재 인정을 받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회사와 근로복지공단, 병원 등이 짜고 산재가 아닌 것으로 조작하기 일쑤였다. 또 산재 인정을 받아도 치료를 위한 휴업기간 동안 평균임금의 60%로 살아야 했으며, 치료를 받고난 뒤에는 재취업 걱정을 해야 했다.

이런 산재환자들의 불만이 7.8월 노동자 대투쟁 와중에 산업재활원 중앙병원 입원환자들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환자들은 계속 시위를 벌이며 노동부, 민정당 등을 찾아가 백방으로 호소하지만, 번번이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11월3일 주안 진흥요업에서 일하다 쓰러져 중앙병원에 입원한 만 17세의 김성애 양이 병원 7층 옥상에서 투신자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성애 열사가 숨진 직후 8월 투쟁 과정에서 결성된「산재노동자연합협회」(회장 김영술, 하반신마비)와 중앙병원 환자들로 구성된「고 김성애 장례대책위원회」는 회사 측과 위로금 4,500만원, 5일장에 합의를 하고 ‘산재노동자장’으로 하여 11월 7일 오전 9시경 발인-부평역 노제-장지 순으로 장례계획을 세우고 경찰과 장례식을 보호해줄 것을 약속받는다.

당일 문익환 목사, 재야인사, 인천지역의 노동자, 학생, 산재환자 등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영결식을 갖고 운구차 앞뒤로 흰 광목을 두 줄씩 늘여 환자들이 그것을 잡은 상태로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송내삼거리 부근에서 ‘장례차만 떠나라’며 무장경찰과 가스차가 장례행렬을 가로막았다.

선두에 선 경환자들이 항의하는 순간 경찰이 최루탄 10여 발을 터뜨리고 무술경관(일명 ‘백골단’)들이 환자들을 폭행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산재환자들의 목발을 빼앗아 그걸로 환자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순식간에 경인 국도는 환자들의 의족이나 의수가 굴러다니고 환자들은 최루탄에 아우성치고 맞아서 비명을 질렀다. 경환자들이 중환자들의 휠체어를 밀고 있었는데 무술경관이 경환자를 발길질하여 중환자들이 휠체어와 함께 길바닥에 나뒹굴기도 했다.

무술경관들은 “개새끼들 병신들이 왜 지랄들이야”, “병신 육갑하네” 등의 욕을 하며 패기도 했다. 산재환자 홍종남은 성했던 오른 다리가 부러지고 김성진은 팔이 부러지는 등 상당수 환자들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21명이 연행된 가운데 장례차는 아수라장이 된 앞뒤의 행렬을 뒤로한 채 경찰차에 인도되어 김성애 열사가 일하던 진흥요업에 들른 후 팔당공원묘지로 향했다. 애초 장례대책위와 유가족이 정해놓은 장지는 부평 공원묘지였다.

18세 어린 소녀는 하늘나라로 가는 날마저 편치 못하였다.


87년 산재노동자 투쟁일지

08월 11일일 중앙병원 산재환자 1차 50명, 2차 600명 모여 산재보상법과 재해환자 우선취업보장 및 복지개선 등 토의
08월 12일산재환자 150여명 모여 노동부를 상대로 8개 요구사항 채택
08월 13일300여명이 병원광장에 모여 집회 후 송내삼거리(경인국도) 점거시위 전경과 대치하다 해산. 노동부 보상과장 방문
08월 14일병원 광장 600명 집회. 전경이 환자를 구타하자 격분한 환자들 경인국도로 가두시위. 역곡삼거리까지 진출하여 새벽 3시까지 격렬 시위
08월 15일노동부 차관이 와서 협의 결과 산재노동자들이 요구사항을 서면으로 노동부에 접수하기로 함
09월 11일「전국산재노동자연합협회」(회장 김영술) 결성. 이양원 변호사 도움으로 호소문 작성(19개 요구사항)09월 22일전국 산재환자 1,000여명 서명받은 호소문을 동아, 조선, 중앙, 서울신문과 보사부 국회의원 4명, 민정·민주·신민·국민 등 4개 정당, 노동부장관에게 발송.
09월 29일80여 명 노동부장관 면담 요구하여 대표자 6명 청사 민원실 안에서 ?노동부 국장, 근로복지공사 사장면담 19개 요구사항 관철 구두약속함
09월 30일민정당 민원국장과 민원실장, 노동분과 위원장과 면담 요구사항 7-80%관철될 것이라 함.
10월 16일병원 정거시위 진료거부(19일까지 계속)10월 20일병원직원 20-30명 농성장 들이닥쳐 농성환자들 격렬하게 항의
10월 26일병원 계장이 환자들에게 사과.10월 28일환자대표 12명과 노동부 산재보상국장 협상 결렬. 환자들 재농성
11월 03일중앙병원 산재환자 김성애 7층 옥상에서 투신
11월 07일김성애 장례식. 장례 행렬 막는 경찰의 무력 진압에 환자들 경인국도에서 격렬 시위 환자 21명 연행, 다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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