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9월 3일 전북 부안군 산내면(현 변산면) 마포리 산기마을에서 부 박창기(朴昌基)와 모 이옥례(李玉禮)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1974년(16세) 익산 남성중학교를 졸업, 전주고등학교에 입학, ‘홈룸’시간에 시국에 관한 발언으로 학교에서 요주의 인물이 됨. 더이상 억압적인 학교생활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퇴.
1975년(17세) 고등학생 문학써클 모임에 참여하고, 시화전 개최. 쏘비에뜨 혁명 등을 빗댄 창작시 때문에 경찰조사, 가택수색 당함. 김지하의 ‘오적’을 소지한 혐의로 보안대에서 조사받음.
1976~79년(18~21세) 종로에서 민청학련 관련인사를 만나 민주화운동에 관한 토론모임을 가짐.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교류. 종로 초동교회 청년회 활동을 하며 시와 문학비평문 등을 기고.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해 민주화를 바라는 기독교 및 재야인사들의 모임에 참여함. 대학연합문학써클 ‘청청(靑靑)’에 참여
1981년(23세) 군 제대 후 민중문화운동, 민중신학, 학생운동, 기독교계 관련인사 등 각계각 층과 교류하며 신촌에서 쌀가게를 운영함. 동인지 『말과힘』을 발간. ‘반시(反詩)’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함. 1970~80년대 노동운동을 정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성효숙을 만남.
1982~85년(24~27세) 구로동과 철산리 산동네에서 생활하며 3공단 등지의 제본회사, 곤로회사 등에 취업. 권오광, 고(故노) 조영관 시인 등 학생운동, 노동운동계의 벗들, 민중문화운동가들과 교류함. 첫번째 산문집『공장옥상에 올라』(풀빛 1983) 출간. 시국집회에서 현장시를 낭송하기도 함.
1984년(26세)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소모임을 가짐. 민중문화운동협의회 회원으로 시국집회와 철야농성 등에 참여함. 민요연구회를 창립하고 창립간사로 일함. 첫 시집『취업공고판 앞에서』(청사) 출간.
1985~87년(27~29세) 고(故) 김도연이 설립한 공동체출판사 편집위원으로 활동함. 노동문화패들과 함께 인천 5·3항쟁에 참여함. 이 해 가을 근거지를 부평으로 옮긴 ‘두렁’의 성효숙과 함께 산곡동으로 이사함. 인천 보르네오가구 등에 생산직으로 취업. 유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관련 집회에 참여함. 두번째 시집 『대열』(풀빛) 출간.
1987~90년(29~32세) 민중문화운동연합 회원으로 ‘두렁’과 함께 박종철 열사에 대한 영상제작에 참여함.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김정환, 이용배, 문승현 등 과 함께 활동하면서 영화분과 일을 맡음.
1993~95년(35~37세) 부평 산곡동에서 부평4동으로 이사하여 2005년 11월까지 생활함. 세 번째 시집『김미순傳』(실천문학사) 출간. 노동과 현실에 투철한 문학정신을 평가받아 제12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함. 송성섭(풍물) 허용철(미술)과 함께 인천민예총 창립.
1997년(39세) 네번째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창작과비평사) 출간.
1998년(40세) 12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를 창립하고 2000년까지 부회장으로 일함.
1999~2002년(41~44세) 인천민예총 사무국장으로 일하며(2000~2001), 강광, 이종구 등과 함께 활동함.
2002년(44세) 다섯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 출간,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함.
2002~2006년(44~48세) 인천민예총 부지회장(2002~2005),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2004~2005) 및 이사(2002~2006) 역임. 산문집『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출간.
2006년(48세)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타계.
2007년 5월 11일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창비) 발간, 인천 주안 컬쳐팩토리극장에서 1주기 추모행사를 가짐,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박영근과 조영관을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열사로 추천.
(지면상 연보를 줄임. 장지는 경기도 안성 초동교회 가족묘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