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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5·3민주항쟁이란?
    (사)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제공
    1986년 5월 3일 인천남구 주안사거리 일대에서 80년 5월 광주이후 최대규모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검찰은 이날의 시위를 좌경용공 세력에 의한 체제 전복기도로 단정하고 형법 115조 소요죄를 적용하여 129명을 구속하고 60여명을 지명 수배하였다. 그러나 이날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80년 5월 전두환 일당에게 빼앗긴 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민주화 시위이며, 폭력은 경찰이 먼저 행사하여 유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이날의 시위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은 소위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87년6월29일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할 때까지 민주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이날의 시위를 인천5·3민주항쟁이라고 부른다.

    1986년 대한민국 국민은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겨 대통령은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다. 노동자, 농민, 서민대중은 군사정권과 악덕자본가의 수탈 속에 인간이하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85년 2월 총선에서 대통령직선제를 공약으로 내건 신민당이 승리하면서 정국은 직선제개헌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신민당의 개헌추진지부 현판식대회를 계기로 전국각지에서 민심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86년 인천에서는 84년 11월 인천지역 학생운동 출신자들 중심으로 건설한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이하 인사연)과 인천의 노동자들이 건설한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이하 인노련)이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86년 5월 3일 신민당의 개헌추진인천지부 현판식대회는 수도권집회라는 점, 인천이 대규모공업지대라는 점에서 온 국민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5월 3일 주안시민회관 앞-12시가 조금 지났을 때 시민회관 건너편 주안1동 성당에서 나온 인사연과 민통련(민주통일민중연합)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와 이미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서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투쟁한 인노련 및 학생시위대는 시민회관 앞 사거리를 점거한 채 신민당의 행사와는 별도로 집회를 개최하며 직선제와 노동3권 보장 및 민중생존권 보장을 요구하였다.
    시민회관 앞 사거리는 노동자, 학생, 시민들로 가득 찼다. 대회개최예정시각인 2시가 채 되기도 전에 이미 그 곳은 시위대와 최루탄연기로 가득 차 신민당의 현판식대회는 무산되었다. 탄압-전두환 군사정권은 국민의 민주화열기에 밀린 정국을 신민당의 인천5·3민주항쟁을 계기로 반전시키고자, 좌경폭력세력으로 몰아가기 위한 계산된 음모로, 일부 시위대의 반미 주장 등을 문제 삼아 인천5·3민주항쟁을 좌경용공세력에 의한 체제 전복기도로 규정했다. 이어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구속, 수배, 고문 등 민주화운동 단체를 송두리째 뿌리 뽑으려 들었다. 군부독재정권의 무리한 탄압은 부천서 성고문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이어져 87년 6월항쟁의 불길로 타오르게 되었다.

    6월 항쟁-군사쿠테타로 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일당으로부터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민주세력의 투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87년6월29일 노태우의 “국민의 대통령직선제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공식선언을 하게 하였다.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끔찍한 비극이 발생한 지 7년 만에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반환된 것이다. 인천5.3민주항쟁은 이런 6월항쟁의 도화선이요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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